1. 금요일. A가 4교시만 하고 집에오는 날이다. 평소엔 오자마자 공부시간까지 10분정도밖에 여유가 없지만 오늘은 1시간도 더 쉬었다가 공부를 할 수 있다. A는 자기가 하고 싶어하던 놀이를 하고 책을 본 후 시간에 맞춰서 공부를 하러 왔다. 그런데 오늘 유난히도 A가 집중을 하지 못했다. 단순 연산 문제집의 경우 빠르면 5분, 길어도 10분정도면 4쪽을 다 풀어내는 녀석이 오늘따라 20분도 넘게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갑자기 덥다고 옷을 벗고 문제가 이해가 안된다며 엉덩이를 가만히 있질 못한다. 머리를 쥐뜯고 들썩이는 모습에 화가 나지만 놀다가 공부를 한 거니 집중이 좀 어려울 수 있겠다 싶어서 지켜보기로 한다. 대신 단호하게 조금 더 집중하자고 말하고 다음에는 금요일이라도 공부를 다 해 놓고 놀자고 설득해본다. 알았다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여전히 진도는 나가지 않는다. 결국 붙들어 놓고 문제를 하나씩 집어가며 같이 읽어보면서 문제를 풀게 한다.
결국 태권도 가기전까지 1시간 동안 아이는 과제를 다 해내지 못했다. 평소의 겨우 절반 정도만 과제를 해냈고 나머지는 태권도에 다녀오고 하기로 약속을 하고 아이를 태권도에 보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늘 아침에 약을 먹였던가?
그랬다. A는 오늘 오전 약인 콘서타와 졸로푸트, 페니드를 모두 먹지 않은 상태였다. 그동안 콘서타18이 아이에게 너무 저용량이라 공부할 때 약효과가 피크타임이긴 해도 아이의 집중력 수준은 참 아쉽다고 이야기해왔는데(페니드는 오전이면 약효가 다 끝나고 또 5밖에 안되니까) 아니었다. 저용량이라고 생각했던 콘서타18마저도 없는 A의 집중력은 문제집 한 장을 소화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1년 반 넘게 약을 복용하고 있었고 그래도 좀 자란 상태니 집중력도 많이 좋아졌을꺼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나의 실수로 약을 먹지 않은 상태의 아이와 공부를 해보니 내 아이의 ADHD는 내 아이의 능력을 정말 많이 갉아먹고 있는거구나 하고 실감이 난다.
콘서타18은 현재 23키로인 A의 몸무게에 비해서는 확실히 저용량이지만 그 효과를 내가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메디키넷처럼 확! 잡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왔고 공부할 때 집중력이 아쉽다고만 생각해왔는데 그거라도 없는 상태인 A는 정말 공부에 5분도 집중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약을 먹이지 않은 건 챙기지 못한 엄마탓인데 아이가 문제집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닥달 한 것이 아이에게 참으로 미안했다. 그나마 화를 내지 않은게 다행이랄까...
2. 다행히 바로 다음주 월요일이 의사와의 진료예약이 잡혀있었다. 의사에게 아이의 금요일 상태를 말하자 아무래도 약효없이는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공부할 때는 꾸준히 먹여주는게 엄마도 아이도 힘들지 않을꺼라고. 그리고 의사를 만남 김에 아이가 파닉스를 떼는데 너무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글 뗄때도 비슷한 경우였던 걸 기억한 의사가 말했다.
"가벼운 난독증세가 있는 것 같아요. 기호를 인지하는게 힘들어서 그렇지 파닉스 부분만 잘 떼면 나머지 영어공부는 잘 따라 갈 것 같습니다. 지능이 문제가 있는 아이가 아니고 오히려 지능은 높은 편이니까요. 기호랑 매칭이 어려운거니 조금 힘드시더라도 기초 파닉스만 잘 떼게 도와주세요."
한글공부할 때도 자음과 모음으로 하나하나 떼서 공부시키느라 고생을 했었다. 그나마 찬찬한글의 도움으로 한글을 뗐고 지금은 책은 곧잘 읽는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글을 쓸 때는 띄어쓰기나 마침표 등을 잘 챙기기 어려워한다. 복잡한 받침 같은 건 아직 2학년이니 천천히 하면 될 것 같아 큰 걱정은 아니지만 의심했던 난독이 있는 것 처럼 보인다니 영어는 또 어떤식으로 도움을 줘야할 지 막막하다.
알파벳 소문자의 b와 d를 헷갈리고 i발음과 e발음을 늘 반대로 말한다. f와 t를 종종 헷갈려하기도 한다. 확실히 난독증세가 있어보이긴 한다. 나 역시 어릴때는 숫자 4를 꼭 반대로 썼다고 하니 그 부분도 나를 닮은건가 싶기도.
그렇다고 완전 난독이라고 하긴 좀 어려운것 같기도 하고 의사도 난독검사를 받아보라는 이야기는 없어서 도움을 받거나 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 아이의 영어공부를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 지 고민 해보는 중이다.
3. ADHD임을 발견하고 약을 먹인걸로 그마나 큰 산은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냥 거대한 산맥의 초입에 있는 동산 하나를 넘었던 거란 걸 알게 됐다. 한글이라는 산은 그나마 거의 넘어가는데 저 앞에 영어라는 또 높은 산이 나와 A앞을 막고 있다. 거기에 나 역시 나이탓인지 원래 ADHD가 나 때문이었는지 알 순 없지만 아이의 약을 챙기거나 준비물을 챙기는 것이 종종 버겁게 느껴지고 있어서 ADHD약 없이 아이가 하루를 보내게 될까봐 두렵다. 그나마 저번주 금요일엔 학교 수업이 적은 날인데다가 특별활동이 2시간이나 있어서 아이 상태가 크게 티나지 않았던 것 같다.
A에게 금요일에 수업받기 어렵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너 원래 먹는 약을 아침에 안 먹고 갔잖아? 괜찮았어? 하고 물으니 아! 그래서 수업이 좀 어려웠나?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한다. 수업을 방해하거나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아이가 집중하려고 노력해도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하니 또 한 번 마음이 에리다.
결국 남편과 아이 약복용을 더블체킹하기로 합의했다. 먹었는지 아닌 지 나도 남편도 좀 더 적극적으로 챙기기로. 물론 남편도 잘 깜빡이는 편이므로 장담은 못하겠다. 알람을 따로 맞춰야겠다 싶기도.
어렵다. 아직도. 두려운건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 된 것 같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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